[쉬어가면서]내 인생의 시아버지, 나를 아껴주는 사람

블라인드라는 익명의 게시판에서도 아직 살만한 세상임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


직장인이 이용하는 블라인드에서 어느 한 글이 따뜻함과 감동을 주고 있다. 흔히 블라인드는 익명을 보장하고 있어 좋은 경험이나 감동적인 글보다는 비판, 비난, 조롱 등이 많은데 한편의 시와 같은 자신의 경험담을 게재하였다.


제목은 '나의 시아버지 이야기'이며 편집할 경우 원작자의 의미를 왜곡할 수 있어 블라인드에 나온 전문을 게재한다. 소제목은 '내 인생의 시아버지 인연 :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다.


내가 남편을 만난 건 25살때였다. 남편과 첫 만남에 어색하게 파스타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남편이 내게 말을 걸 때 입술을 떨고, 커피를 마실 때 긴장해서 덜덜 손을떠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8살의 적잖은 나이차이에 고민이 되었지만 남편의 순수한 모습에 나도 마음이 동해서 연애가 시작되었다. 당시 남편은 결혼적령기에 접어들고 있어서 시부모님이 나를 많이 궁금해하셨다, 만난 지 6개월 쯤 되었을 때 시부모님께 식사제안이 왔다. 우리 부모님보다 열 살이 많다보니 부모님의 느낌보다는 약간은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다. 시부모님은 첫만남에 나에게 존댓말을 써 주셨다. 아버님은 나를 보며 연신 웃으시며 기분이 좋다며 술을 잡수셨다. 좋다며 웃는 모습이 남편보다 더 순수하게 느껴졌다.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엔 빚을 내는 게 두려워 낡은 15평짜리 아파트에 살다가 대출을 내어 34평 신축 아파트를 계약했다. 이사가던 날 아버님은 집을 둘러보시고 우리가 정말 좋은 집을 골랐다며 술을 잡수셨다. 돌아가시는 길에 길거리에서 우리 며느리는 연예인 수지보다 더 예쁘다고 크게 말씀하셔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


결혼 후 나는 간호사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끼고 진로에 대한 고민을 다시 시작했다. 교사가 너무 되고 싶었다. 아버님께서 “ㅇㅇ이는 무슨 일을 할 때 제일 행복하니” 여쭤보셨다. 며느리가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게 탐탁치 않을만도 한데 앞으로 살 인생이 길다고, 네가 가장 행복한 일을 해야한다고 하셨다. 초등교사는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칠 수 있는 직업이라서 정말 중요하고 가치로운 직업이라고 말씀하셨다. 500만원을 주시면서 후회없이 공부해보라고 하셨다. 나를 며느리 보다는 한 사람으로 봐주시고 존중해주시는 게 느껴져서 감사했다. 내 꿈을 지지해주는 시부모님과, 모의고사와 수능날에 기꺼이 연차를 내고 도시락을 싸주는 남편의 정성 속에 나는 수능을 성공적으로 보고 올해 교대에 입학을 했다. 시어머니는 성당에서 초를 켜고 새벽기도를 하셨고, 시아버지는 내가 공부가 잘 안되거나 멘탈이 흔들려 힘들 때마다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들어주셨다. 엉엉 울며 늦깍이 공부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내게 용기를 북돋아주셨다. 내 도전의 성공은 내 주변사람들의 응원의 결과이다.


아버님이 나를 예뻐하고 아껴주시는 게 느껴진다. 아버님은 내가 쿠키를 구워가면 하나를 남겨놓고 서재앞에 세워두셨다. 두고두고 보면서 내 생각을 하고싶다고 하셨다. 아버님과 장을 보러가면 팔짱을 끼고 내가 먹고싶은 걸 고른다. 대게를 먹으면 남편과 시아버지 둘 다 게살을 발라서 나를 먹이느라 바쁘다. 아버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내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나도 아버님이 좋다. 피가 섞이지 않았는데 이정도로 사람이 좋은 게 신기하다.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주역 이야기나 동양사상 이야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아버님과 대화하는 게 좋다. 아버님은 강단에 서셨을 때는 인기가 없는 교수셨지만 며느리에게는 인기만점이다, 아버님을 닮아서인지 남편도 성격이 차분하고 순하다. 아버님만큼은 아니지만. 처음엔 남편 때문에 시댁과 가족이 되었지만, 이제는 반대로 가끔 남편 때문에 힘이 들거나 결혼생활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시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참거나 넘길 때가 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아버님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요즘은 병원에서 밤근무를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학교다니는 바쁜 생활 때문에 올해는 시댁에 잘 연락도 못하고 거의 못갔다. 잠을 줄여 돈을 벌고 공부를 하는 내 모습에 마음 아파하신다. 아버님이 얼마 전 통화하면서 “며늘아기야 보고싶다. 술먹으니까 더 보고싶다.” 하면서 우셨다.


술 드시면 항상 웃으셨는데 엉엉 우는 아버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도 아버님이 보고싶다. 포항에는 수국이 활짝 피었을 것 같다. 옥상 테라스에서 고기도 구워먹고 도란도란 이야기했던 시간이 그립다. 스타벅스에서 화이트초콜릿모카를 처음 드셔보시고 달콤하다며 웃던 얼굴이 보고싶다. 아버님의 주름이 그립다. 나의 바쁜 시간동안 아버님이 너무 늙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시댁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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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 기자 다른기사보기